모형과 나

* 크래프트월드(www.craftworld.co.kr) ‘모형과 나’ 에피소드 공모에서 입상했던 글입니다. (2001. 8)

지금 내 책상에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베트남 3색 위장 도색을 끝낸 F-100 수퍼세이버가 놓여있다. 지형 작업은 물론이려니와 에어브러시 색칠 자체도 이제 겨우 두 번째일 뿐이니 객관적으로 볼 때 가히 잘 만든 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고 자꾸만 바라보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같다.

일명 ‘조립식’이라고 불리던 모형에 내가 왜, 언제부터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용돈이 있으면 언제나 문방구로 달려가 ‘조립식’을 샀던 것은 물론이고, 시험을 잘 봤거나 문제집을 다 풀었을 때처럼 어머니가 경품을 주실 때에도 항상 ‘조립식’을 고집하던 나였다. 물론, 어릴 때 학교 앞 문방구 처마(?) 밑에서 이빨로 비닐과 본드 뜯어가며 로봇 한 번 만들어보지 않은 남자애가 어디 있으랴마는, 나는 그러한 열병이 조금 더 깊게, 그리고 오래 갔던 것 같다.

아무리 만들어도 뭔가 허전한 느낌, 완구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던 나의 ‘조립식’들이 ‘모형’이라는 단계로 업그레이드 된 계기는 중학교 때 창간된 국내최초의 모형지 “취미가” 덕분이었다. 자기처럼 내가 모형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학원 친구가 새로 나온 잡지라며 내게 보여준 취미가는 내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 잡지를 통해 나는 에나멜을 알았고 타미야를 알았으며 하세가와를 알았다. 베트남 미군인형에 에나멜과 이쑤시개(!)로 91년 당시 걸프전 미군 사막위장도색을 칠한 뒤 우쭐해서 그 친구에게 보여줬다가 망신 당한 것을 통해 고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난생처음 2만 3천원이라는 비싼 조립식(타미야 메르카바 Mk.1)을 사서 만들어본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그렇게 좋아하던 모형도 대입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라기보다는 내 자신이 점차 다른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졌고 여유가 없어져갔다. 하나하나 모아두었던 에나멜들은 큰 비닐에 넣어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었고 창간호부터 한권한권 모으기 시작했던 취미가도 36호 이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이란 것이 어쩜 그리도 간사한 것인지, 한 번 잊은 모형에의 기억은 대학에 간 뒤에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았다기보다는 내 스스로가 다시 쳐다보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야 옳으리라. 어느날 책상서랍을 정리하다가 나온, 다 굳어버려 이제는 못쓰게 된 에나멜병들을 보고 약간의 쓸쓸함과 가슴휑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것 뿐이었다. 더 이상 내가 그렇게 좀스럽고 시간 많이 걸리는 일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모형보다 재미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당연히 에나멜병들은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

그렇게 잊은 줄 알았던 ‘모형’이라는 세계에 다시 눈을 뜨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할 때였다. 소집해제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던 2000년 가을, 정말 말 그대로 “갑자기”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냥 가끔 생겼다 사라지는 그러한 생각이려니 치부하기에는 정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욕구였고, 우습게 들릴진 몰라도 손가락마저 간지럽게 느껴졌다. (‘손이 간지럽다’는 표현이, 실제로 느껴질 수 있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든 것도 처음이었다) 결국 주체할 수 없는 욕구 때문에 그 길로 곧장 동네 문방구에 가서 아카데미 1:72 F-14A를 사와 조립하기 시작했다. 손을 뗀지 거의 6년만이었다.

모형을 다시 시작한 것은 1년이 채 안 된다. 하지만 그간 투자한 비용(?)을 생각해보면 예전처럼 내가 다시 모형을 잊은 채 살 것 같진 않다. 사재기해둔 키트, 잡지 과월호, 그리고 에어브러시와 콤프레서까지… 우스갯소리지만 정말 나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너버린” 셈이다.

글쎄, 손이 간지러워져 가면서까지 왜 갑자기 6년만에 모형을 다시 시작했는지 설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다시 모형을 재개하면서 모형의 매력이란 것에 대해 하나씩 눈이 뜨이는 것을 느끼곤 한다. 실제로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한다는 매력, 모형들 하나하나가 갖는 나름대로의 조형미, 화려한 마킹(나는 주로 현용제트기류를 만들기 때문에) 등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내가 최근에 깨닫게 된 모형의 매력이란 그것이 “창조”라는 아주 원초적인 테제를 충족시킨다는 점이다.

굳이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 인간을 만들었다는 성경의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읽은 이어령씨의 수필에 보면 반질반질한 호마이카상(床)보다는 사람이 닦아서 광을 내야하는 목상(木床)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아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부분이 나온다.

투박하더라도 손에 땀이 나도록 닦으면서 서서히 광택을 발하는 목상을 보면 내가 왜 저 작은 플라스틱 조각에 열광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매일 구두닦이에게 구두를 맡기던 사람이 스스로 구두를 닦다가 자신이 낸 광택에 스스로 뿌듯해 하는 것과 같은, 동일한 희열이다.

여러 개로 조각난 플라스틱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붙일 때마다 서서히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 역시 짜릿한 일이다. “나는 돌을 돌로 보지 않는다오. 내겐 저 돌 안에 내가 만들고자 하는 대상이 갇혀있어 자신을 꺼내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오”라던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물론, 우리는 조각을 붙여 만들고 미켈란젤로는 덩어리를 쪼개어 만들었다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말이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본다면 스케일모형이 뛰어나다느니 SF모형이 뛰어나다느니 하는 다툼은 전혀 부질없는 것이 된다. ‘만든다, 창조한다’는 기쁨 아래에서는 모든 모형이 똑같기 때문이다.

다만, ‘얼마나 진지하게 그 창조의 작업에 임하느냐’가 문제될 뿐인 것이다. 같은 물감, 같은 캔버스를 갖고도 모두가 다른 그림을 그리듯, 우리도 같은 플라스틱에 모두가 다른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창조”한다는 마음가짐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집에서 굳이 내가 모형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시는 이유도 비행기 하나를 만들면서도 이런 철학을 얘기하는 자식놈을 부모님께서 믿어주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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