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10분 일찍 맞춰놓았는데
회사동기모임 가서 보니 20분 늦게 가고 있었다.
오늘도 날짜를 29일로 가리키고 있길래
'아니, 이 자식이...' 하면서 또 바늘을 뱅뱅 돌려줬는데
사무실 와서 보니 얘가 또
9시에서 헉헉대면서 바늘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 않은가.
태엽(?)을 이리저리 돌려서 다시 가게 만들긴 했지만
이제 얘도 수명이 다 해가는구나...하는 생각에는
큰 변함이 없다.
........
이 손목시계를 산 건
순전히 '충동구매' 때문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던가?
롯데백화점에서 50만원어치를 사면 휴대폰을 개통시켜준다길래
엄마가 아버지 휴대폰 하나 만들어드리자고
이것저것 물건을 샀었다.
근데 버는 것만큼 쓰는 것도 어렵다고
필요한 걸 다 샀는데 아직 50만원 되려면 11만원인가가 모자라는 거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얼떨결에 13만원짜리 손목시계를 하나 사게된 건데...
그때 우리 아버지가 '사은품'으로 얻은 휴대폰은 지금 두번째 기계로 바뀌었고
번호 역시 엄마를 거쳐 동생한테 넘어간 상태지만
내 손목시계만큼은 그때 산 걸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차고 있으니
충동구매한 것치고는 참 오래 쓴다 싶다.
은색 스테인레스에 짙은파란색 원판이 예뻐서
처음 살때부터 '얼떨결에 사긴 했지만 예쁜 거 잘 샀다' 싶었는데
2년전부터 시계가 맛이 가서 새 걸 사볼까 하면서도
꼭 최종단계에서 [취소] 버튼을 누르게 만든 건
그만큼 얘가 예뻐서라기보다도(사실 예쁘기도 하지, 흠흠...)
그만큼 정이 들어서인 것 같다.
아파트세차할 때 빨간다라이통에 담긴 더운물에 몇번씩 담금질도 해봤고
공익요원할 때 예비군통지서 돌린다고(^^) 노량진 산동네를
밤 10시 11시까지 돌아다녔을 때도 얘를 차고 다녔다.
바다 건너 캐나다와 미국에 갈 때 짐칸에 실리지 않고
나랑 같이 태평양을 10시간 동안 같이 건너간 것도 얘였다.
결국 밴쿠버에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걸 들고
새 시계값보다 인건비(수리비)가 더 비싸다는 그 나라에서
10달러 주면 새 시계 살 수 있는 걸
그 이상의 값을 치루고 건전지를 교환하는 '비경제적인 선택'을 하게까지 한 건
'얘'였기 때문이 아니라
얘랑 같이 한 '시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새로 간 건전지가 1년도 못돼 계속 죽는 걸 보고
한국에 와서 대대적으로 회로를 교체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시계방 아저씨가 이 시계는 하도 낡아서 회로구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어째저째해서 3만원이나 주고 회로를 새로 갈았는데도
이제 또 건전지가 다 된 조짐이 보이니
헤어질 날이 눈에 선한 마누라를 간병하는 남편의 심정이 이런건가?
오늘도 새 시계를 사볼까 하고
이런저런 웹스토어를 돌아다녔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웹브라우저를 꺼버렸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이 낡은 손목시계는
시간을 '보여주는' 물건뿐만 아니라
시간을 '담아가는' 물건이기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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