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ously Light Modeler

검색 :
RSS 구독 : 글 / 댓글 / 트랙백 / 글+트랙백

영어의 침투력 2

 
 
 
 
기존의 우리말 단어 대신
영어를 직접 쓰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속도'의 문제다.

특정분야에서 새로운 뜻을 가진 영어단어가 등장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걸 그대로 갖다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로 적힌) 그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기도 바쁜 마당에
굳이 한 단어 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여
우리말에 이미 있는 단어를 끌어다쓰려는 노력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러한 '속도' 위주의 언어경쟁사회를 살아가고 있자면,
모든 외국어의 개념을 분석하고 연구하여
그에 맞는 새 단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던 일본 난학자들의 시기야말로
인류문화사의 관점에서 자신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것임을 고백한
고종석(감염된 언어, 이 게시판에도 있다)의 찬탄에
수긍이 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

우리말단어 대신 영어단어가 직수입되는 이유로
또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개념을 명확히 하려는 과민성이다.

'에이징'을 '길들이기'라고 쓰자고 하면
헤드폰전문가들은 십중팔구 어떻게 '길들이기'가 '에이징'을 대체할 수 있느냐며
펄쩍 뛸 것이다.

이러한 심리의 기저에는
'볼륨을 중간에 놓고 지속적으로 소리를 통하게 함으로써
헤드폰 내의 전류와 저항을 고르게 하는 작업'이라는 '개념'을
'길들이기'라는 말로는 도저히 대체할 수 없다며
개념의 엄밀성을 고수하려는 청교도적인 태도가 스며들어있다고 본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말이 우리의 의식구조와 너무나 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
'길들이기'라는 말이 가지는(또는 연상시키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우리의 의식구조 속에 너무나 깊이 박혀있어
'에이징'을 대체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저지시킬 정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어사용자들이 실생활에서 쓰는 '길들이기'라는 말이나
영어사용자들이 실생활에서 쓰는 '에이징'이라는 말이나
그 핵심적인 의미에서 차이는 거의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말의 '길들이기'는 그 의미의 유연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새 제품/새 사람 길들이기'라는 분야 외에서는 거의 활용도를 상실했고
영어의 '에이징'이라는 말은
사용자들의 적극적인 의미확장노력에 따라 의미의 외연을 계속 넓혀감으로써
'나이먹기'라는 본래의미 외에 헤드폰, 치즈, 심지어 회계(채무의 회수가능도)에서까지
각각 고유의 의미를 부여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쨌거나 이런 나의 가설이 맞다면
이는 한국어와 영어라는 대등한 두 언어의 두 단어가
각각 의미확장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어의 '에이징'이라는 단어가 그만큼 의미의 외연을 넓혀
비영어권에서도 널리 쓰이게 된다는 것은 그 단어의 사용자까지 1명 더 획득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영어의 권력화'와도 직결된다.

아직 읽은 책은 아닌데, 공병호의 '10년 후, 세계'에서는
10년 내 영어의 권력화가 가속되리라는 전망이 있다고 한다.
뭐 사실 책에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지금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개념적 사실이지만,
'에이징'이 태평양 건너편 한국이라는 코딱지만한 나라에서도
그나라 고유의 '길들이기'라는 단어를 밀어내고 한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에서
그 생생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저자가 어느 라디오프로그램 인터뷰에서 했다는
'한국어가 정보와 가치를 생산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다.

저 말 속에는
기존에 전혀 없던 새로운 개념을 한국어로 명명할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국학자도 영어나 라틴어로 개념을 명명한다)
계속 의미를 넓혀가고 사용자까지 늘려가는 '에이징'과 비교되어
의미의 유연성을 잃고 경직되어 '1단어가 1의미'만을 갖게 된 '길들이기'처럼
한국어의 영향력이 계속 축소되리라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한국어가 현재의 영향력을 앞으로 그대로 유지해나간다 해도(현재 1, 미래 1)
영어의 영향력이 앞으로 더 팽창한다면(현재 1, 미래 99)
한국어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든다(현재 50%, 미래 1%))
2005/03/29 11:10 2005/03/29 11:10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