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onym

 
 
 
 
시중은행들이 '우리은행'에 대해
상표등록 무효 심판을 청구했다는데...

예전에 지금의 여당이 '열린우리당'이라는 이름을 짓고
약칭 '우리당'으로 한다 했을 때도
야당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사실 시중은행들이 '우리은행' 명칭에 대해 불만을 가진 것은
명칭 그 자체보다는 은행권의 기싸움의 성격이 짙다고 하는데...
사실 몇달전 이런 얘기가 있을 때부터
그냥 금융권 가십뉴스 중 하나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오늘 또 심판청구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진짜 붙긴 붙을 모양이다.

글쎄... 기본적으로 나는
이렇게 보통명사(사실 '우리'는 대명사)를 상호나 상표에
그대로 씀으로써 고유명사화 시키는 작업을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다.

물론 모든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한계'의 문제는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리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예컨대 '우리'나 '나' 같은 '대명사'는 혼란방지를 위해 고유명사화 할 수 없다거나...)
설명이나 설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가뜩이나 의미의 범위가 좁은 한국어 단어들의
의미 외연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그러한 보통명사의 대명사화는 별로 나쁠 것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시중은행들의 반발에 대해 우리은행이 내놓은 반박논거 중에
'고객을 섬기는 자세라면 자신들을 '우리 은행'이라고 하지 않고
'저희 은행'이라고 해야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누가 만들어낸 논거인지 몰라도 참 그럴듯 하다는 생각이 들어 감탄했다.

다른 은행들이 '우리은행'이라는 명칭을 쓰며 혼란을 느낄 때는
내부공문에서 자신들을 지칭할 때 외에는 없다.
대외공문이라든가 고객에게 상품 설명을 할 때,
즉 대외적으로 자신들을 지칭할 때는 '저희 은행'이라고 해야
공손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회사에서 대외공문 보낼 때 '우리 공사'라고 쓰곤 하는데,
이건 상대방에게 기죽지 않으려는 자존심의 측면이 크다.
정말 상대방을 존중하고 섬기려는 자세라면 '저희 공사'라고 써야한다.
근데 이렇게 썼다가는 또 결재선에서 반송받지...흥... **

.........

'우리'라는 말을
보통명사(대명사)로만 써야한다는 심리는 어디에 있을까.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대명사를 고유명사로 신나게 쓰지 않던가?
('아워홈'이라는 급식업체 이름을 외국인 앞에 보여주면 깔깔대고 웃을거다.
'마이홈'도 아니고 '우리집'의 유치한 역어(譯語)인 '아워홈'이라니...)

사실 대명사를 고유명사로 쓰지 않는 것은
하나의 언어적 금기에 가까운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나 '마이', '아워' 이러지
본토에서는 그런 대명사를 쓰는 상표명을 거의 볼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나는 '우리'라는 말의 고유명사화를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적어도 그게 소송까지 갈 심각한 문제라고는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한국어 단어의 활용도를 높임으로써
가뜩이나 의미영역이 좁은 한국어 단어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그러한 기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좀 복잡한데...

한국어가 한국인들과 너무 친밀해서일까?
한국인은 자국어의 의미에 너무 엄격하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국어의 활용도를 높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래에서도 썼듯이
충분히 '길들이기'라고 할 수 있는 단어를
굳이 '에이징'이라고 직수입해서 쓴다.
이건 '길들이기'라는 말이 '에이징'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다는
언어적 결벽증에 기인하며,
궁극적으로는 자국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의도적으로' 넓히는 훈련을
이제까지 해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 이런 언어적 상상력의 부재 또는 미숙이
가장 극도로 표현되는 것이 법조문과 (특히) 법령명이다.
현행 법률 중 가장 긴 제목을 가진 게 83자라는데
(대한민국과아메리카합중국간의상호방위조약제4호에의한시설과구역및대한민국에있어서의합중국군대의지위에관한협정의시행에따른국가및지방자치단체의재산의관리와처분에관한법률...ㅡㅡ;;)
'법률'은 그 성격상, 언어를 엄격히 다뤄야 한다는 태도에는 공감하지만
저쯤되면 가히 '강박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저걸 고유명사화 시키겠다고 띄어쓰지도 않는다)

나 같으면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 해석법률' 뭐 이정도로 간단히 쓰겠다. **

이번 우리은행 상표등록 무효 심판에 참여한 은행들은
모두 한국계 은행이고
외국계 은행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는데
이건 외국계 은행들이 '우리'라는 이름을
타국어로 여기며 별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외국에서 쓰지도 않는 '마이'와 '아워'를 남발하는 것은
'마이'와 '아워'가 영어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과 같이
외국계 은행들 역시
'우리'라는 말이 한국어에서 차지하는 뜻이랄까 위상이랄까...그런 걸
결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어보자면
한국계 은행들이 '우리'라는 말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멀쩡한 은행이름을 KB니 CHB니 대책없이 유치하게 바꿔버린 그들이
한국어에 애정이 있어서 저런다고 볼 근거도 없지 않은가...?
(이름바꾼다고 HSBC되냐?)

개인적으로는 예전의 '한빛'이 더 예쁘고 멋들어진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라고 쓰는 것도
한국어의 개념범위를 넓힌다는 면에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2005/04/18 10:14 2005/04/18 10:14
Posted by 쭝
끄적끄적/머리의 고민들 l 2005/04/1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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