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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택 선생님

 
 
 
 
http://blog.ohmynews.com/nangok/187174

나도 이 선생님을 안다.

십 수년전, 내가 고등학교 1~2학년 때였을까.
키가 작고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국어선생님이 한 해 동안 우리반 국어수업을 맡은 적이 있다.
키가 작아 앞에 앉았던 나에게는, 역시 키가 작은 그 선생님의 얼굴이 피부까지 잘 보였고 교실 뒷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을, 그 선생님 얼굴에 있는 큰 흉터자국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수업 첫 날,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와 갑자기 교탁 위에 앉았다.
세상 모든 일에 따분해하던 남자 고등학생들의 시선은 갑자기 교탁 위로 모아졌고 그 선생님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이름과 별명 - 선생님은 자신의 별명이 '똥차'라고 했다 - 밖에 없었고 그 외에는 그저 그런 농담으로 채워졌던 것 같다.

교탁 위에 터억- 하고 앉은 키 작고 못생긴 선생님에게 잠깐이나마 시선을 두었던 아이들은 이내 무관심해졌다. '특이한 선생님이네...' 정도의 생각은 가졌겠지만 모든 것이 시니컬하고 따분했던 10대의 소년들에게는 선생님의 수업 첫날, 첫 소통의 방식이 관심 밖이었을 거다.

그 뒤로도 선생님과 아이들의 '섞이지 못함'은 계속되었다.
선생님은 주로 수업 진도보다는 다른 얘기를 많이 했고 아이들은 더더욱 시니컬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간혹 무언가 우리에게 강하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 보이던 당당한 눈빛 때문이었다.
시시껄렁한 농담과 잡담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같아 보이던, 작은 키지만 깊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우뚝 서 형형한 눈빛을 내던 그 당당함의 본질이 무엇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것의 많은 부분은 필경, 내 친구가 얘기해준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이라는 선생님의 이력 때문이었을 거다.
그 때까지 '전교조 출신 교사'를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에게 그 선생님에 대한 느낌이란
마치 베를린 유학생들이 독일에서 북한 사람을 처음 접촉하고서 '아, 이 사람들 머리에는 뿔이 나있지 않구나' 하면서 어느 정도는 놀라고, 어느 정도는 신기하고, 어느 정도는 마음저린... 그러한 비슷한 것이었다.

......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인 1989년, 전교조가 출범했다.
그때 나는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해직되고, 고통을 겪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신문에서 본 사진 한 장.
- 가끔 기억이란, 강력한 하나의 영상으로만 남기도 한다.

어느 교실... 교단 위에 한 선생님이 지휘봉('매'일 것이다)을 들고 다리를 꼰채 당당하게 앉아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 교실 문 앞에는 또하나의 선생님이 책 몇권을 든채 어색하게 고개를 떨구고 서 있다.
그걸 제대로 지켜보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다.

자습을 하던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이 '두 담임선생님'의 기묘한 共存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 교실 문 앞에 고개를 떨군 선생님은 바로 어제까지 그 반 학생들의 담임이었던,
그러나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바로 오늘아침 해직을 당한 교사이고
교단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 당당하게 아이들의 자습을 지켜보고 있는 선생님은
오늘 아침 새로이 이 반을 맡게 된 새 담임교사였다. -

.....

그렇게 무수히 많은 선생님들이 해직되고, 교단에 서지 못할 때 나는 그 소용돌이의 외곽에 있었다.
나는 초등학생이었고(초등학교는 전교조 운동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 같다)
전교조란 신문의 사진을 통해서, 그리고 (중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학교생활을 이야기할 때 간혹 들리던
나와 큰 관계 없는 '외부의 사건'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눈 앞에 지금 '전교조 출신 해직교사'가 서 있다.

.....

또 하나, 선생님에 대해 관심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선생님의 독특한 수업방식 때문이었다.
시험 며칠을 앞두고서 1-2개 단원을 주마간산으로 지나가는 일이 잦을 정도로 수업진도 맞추는 일에는 큰 관심도, 큰 능력도(훗날 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나의 오만과 편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없어보였지만, 특이하게도 선생님은 우리에게 항상 무언가를 꺼내고 싶어하고 소통하고 싶어했다.

국어와 크게 관련은 없지만, (그렇다고 시사적인 내용과 관련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무언가 농담 비슷한 식으로 화제를 던지고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끝없이 우리에게 물었다.
그렇게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했다.

... 하지만 머리굵고 세상 모든 일에 귀찮은 10대 소년들은 아무도 그 소통에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고 그것이 하나의 '분위기'가 되어 모두를 붙잡고 있었다. 마치 그 선생님의 제안에 응하는 녀석은 혼자 잘난 체 하는 것 같고, 재수 없어 보인다는 것처럼.

그렇게... 묘하게 동의된 억압의 분위기가 정말 싫었지만,
선생님이 던져주는 질문들에 대해 나의 생각을 말하고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나 역시도 용기 없는 비겁자에 불과했다.

비겁자라는 것이, 내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는 뜻만은 아니다.
나는 선생님이 벌이고 싶어했던 소통의 장을 넓힐 수 있는 권력을 가졌음에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먹 깨나 쓴다는 애들 사이에 존재하는 '주먹의 권력'이 아닌, 소위 우등생축에 들어 아무도 나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한다는, 우등생들과 모범생들만이 누릴 수 있는 '우등생으로서의 권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나는 선생님이 제안한 소통의 장을 함께 열려 하지 않고 그 불씨를 꺼뜨려버린 비겁자였던 거다.

나는 분명히
선생님이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소위 '강남 8학군'의 아이들이라는, 그래서 다른 고등학교보다 더 시니컬하고 더 잔머리를 잘 굴리는 (선생님이 우리들의 '계급'을 더 의식했을지는 알 수 없다. 전적으로 나의 생각에 불과하다) 이 녀석들과 한 바탕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그런 시그널을 계속 보내고 있었지만 아무도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결국 선생님도 끝없는 우리들의 무호응에 조금씩 지쳐갔고 나는 그런 선생님의 지쳐감을 보면서 속으로 비겁자의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었다.

".... 에이, 수업이나 하자, 책 펴!" 라는 말.
나에게는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했던 선생님의 마지막 의지가 닫히는 말로 들려 참 싫어했던 말이었다.

.....

그렇게 한 해가 갔다.
반 아이들, 어느 누구도 그 해 끝까지 국어수업을 좋아하는 녀석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날이 되었다.

무미건조한 수업이 끝나고 10분 정도가 남았다.
선생님은 책을 덮고 준비한 쪽지들을 나누어주었다.

"한 해 동안 나랑 같이 공부하느라 수고 많았다.
그간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 수업에서 개선할 점, 뭐 그런 것들을
이 쪽지에 써서 나한테 주면 참 고맙겠다."


종이가 뒷줄로 전달되었다.
반 아이들은 그냥 몇글자 끄적이고 접어서 다시 앞으로 쪽지를 전달했다.
자다가 깬 애들은 귀찮다는 듯 쪽지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그냥 접어 앞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쪽지가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했던 선생님의 마지막 제안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만큼은... 나와 선생님이 쪽지를 통해 둘만이서 대화를 하는 거니까,
1년 동안 국어시간에 교실을 채우던 그 무호응의 동맹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비겁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기 전의 짧은 시간, 많은 내용을 채울 수는 없었지만
선생님이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
그것을 마음 속으로 좋아하고 지지해왔다고,
우리 반 누구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저만큼은 선생님이 다른 반, 다른 학교에 가서도 그러한 방식을
계속 고집해주길 바란다고... 그런 내용을 써내려갔다.

"뭘 그렇게 많이 쓰냐?"

뒷 자리에 앉은 녀석이 자신의 쪽지를 전달하면서
꾸물거리는 나에게 내뱉은 말에 화들짝 놀라면서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못하고 쪽지를 두세번 접어 나 역시 앞으로 전달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비겁했다.

... 내 생각과 달리 선생님은 쪽지를 그 자리에서 열어보지 않았다.
남고생들이 적은 시시한 내용의 쪽지를 심드렁하게 읽다가
제법 길게, 선생님의 방식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나의 쪽지를 발견하고
감동을 받아 슬며시 웃음을 짓는, 그 웃음이 쪽지의 주인공인 나의 마음도 뿌듯하게 해주는,
그런 영화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모은 쪽지뭉치를 들고 선생님은 그렇게 교실을 급하게 나갔고
교실은 다시 아이들의 왁자지껄거림으로 소란스러워졌다.
그것이 내가 선생님을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

선생님이 교무실에서나마 그 쪽지를 읽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전교조였던 선생님이 과연 우리들을 '계급'적으로 인식하고
강남아이들 특유의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했었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아마 나의 과대망상(?)일 가능성이 크지만)

하지만, 아직도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아프고 부끄럽다.
비단 차용택 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손을 내밀려했던 많은 선생님들에게
'우리'와 '내'가 보여주었던 차가운 무호응들, 그리고 교실 안을 지배하던 어그러진 동의를 깨지 못하고
그 무호응의 카르텔에 협력했던 비겁함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학교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고, 움직일 공간이 많았던 소위 '우등생'이었던 자였기에
내가 느껴야할 부끄러움과 부채의식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용기있는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답할 수 없다.
내가 선생님 앞에서 낼 수 있었던 용기의 크기는
선생님이 나에게 건네준, 4등분한 16절지 갱지 쪽지의 크기에 불과한 하찮은 것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래도 선생님이 그때의 쪽지를 기억하고 있다면
한 가지만큼은 들어주셨으면 하는 게 있다.
여전히 비겁하고 소아적으로 살고 있지만
"사람은 못 되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던 영화 속 대사처럼,
적어도 괴물은 되지 않기 위하여 계속 그 쪽지의 크기를 넓혀가고 있다는 것.
매일매일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

선생님이 가르쳤던 많은 고등학생들 중에서 그 쪽지를 썼던 고등학생이 누구였는지 몰랐겠지만
많은 군중 속에서 그렇게 하나 둘 고군분투 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름모를 제자들이 많을 거라는 것.
선생님이 건넸던 소통에의 제안이 가져온 결과는
당장의 차가운 무호응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먼 훗날, 이름 없는 제자들에 의해 조금씩 넓어져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가르치는 자의 길이고 보람이 아닐까.
2008/08/07 22:42 2008/08/0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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